[증언들] 디스토피아를 파괴하려는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
<증언들>은 2019년 부커상을 수상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장편소설로, 전작 <시녀이야기>에서 15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길리아드를 살아가는 세 여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작 말미에 밝혀진 길리아드 붕괴의 전말을 드러낸다. 길리아드의 창립 ‘아주머니’ 중 한 명이자 유일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리디아 아주머니’, 높은 사령관의 딸로 특권층의 삶을 살고 있는 ‘아그네스’, 그리고 길리아드에서 탈출해 캐나다에서 비밀스럽게 살고 있던 ‘데이지’가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각각 자필서와 녹취록을 통해 길리아드의 뿌리 깊은 부패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는 전작 <시녀이야기>에서 열린 결말로 끝난 오브프레드의 생사 또한 밝혀지면서 그녀의 딸에 대한 단서도 하나 둘 드러난다.
세 여자의 증언들이 정권을 붕괴하는 핵심 수단이 될 만큼 말과 글의 힘은 위대한 것이었다.
(<시녀이야기> 포스팅 참고)
2020/08/12 - [Review/서평] - [시녀이야기] 디스토피아를 살고 있는 한 시녀의 이야기
1. 총평
전작에서 뼛속까지 길리아드 사람처럼 보이던 리디아 아주머니가 바로 이 증언들을 모으는 중심인물이라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같은 여성을 억압하며 권력을 유지해온 길리아드의 역사 깊은 아주머니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스타디움의 악명 높은 교육자가 바로 길리아드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통해 드러나는 ‘아주머니’ 계급의 탄생 과정을 보면, 어떻게든 길리아드에 적응하여 권력을 쌓은 그녀가 세계적인 혁명을 일으킬 용기를 가졌다는 것이 납득되기도 한다. 물론 이제껏 시녀들에게 가한 억압과 폭력은 합리화될 수 없다. 하지만 무슨 방법을 써서도 생존할 만큼 의지를 가진 그녀였기에 거칠고도 치밀하게 길리아드를 파멸로 이끌 수 있었다.
<증언들>까지 읽은 현재 그녀를 묘사해보라고 한다면, 여전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유는 <시녀이야기>를 읽을 때와 전혀 다르다. 그녀는 바늘로 찔러도 피가 안 나는 냉혈한이 아니라, 이미 피가 날 만큼 나 더 이상 나올 피가 없는 시체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사실 길리아드를 몰락으로 이끌 수 있었던 ‘증언들’은 세 사람의 삶을 그대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아주머니든, 사령관의 딸이든, 탈출자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삶 자체가 증언이 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증언’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리디아 아주머니의 오랜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 여자의 삶을 모두 담고 있는 <증언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리디아 아주머니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삼아 포스팅을 하고자 한다.
2. 리디아 아주머니: 두 번의 선택
길리아드가 가하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서는 지난 <시녀이야기> 포스팅에서 구체적으로 논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소설 속 리디아 아주머니는 양극단의 지위에 놓인 두 번의 상황에서 아주 상반되는 선택을 했다. 1) 맨 처음 남성 권력층의 혁명으로 인해 길리아드 체제가 성립되어갈 때와 2) 길리아드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그녀가 아주머니계의 1인자로 자리 잡았을 때다.
º 권력의 재생산(수용)
전직 판사 출신의 지식인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된 그녀는 처음 길리아드의 여성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설하는 데 일조하며, 유일무이한 ‘아주머니’ 지위를 획득했다. 사실 초반에는 이러한 선택이 어리석고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솔직히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파 세력처럼 엄청나게 큰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선택을 강요받기 전 그녀가 경험한 일련의 과정을 정리해보니 그녀는 한 순간에 모든 권한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도 무시당하며 오랜 시간 고문과 압박을 반복하여 경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그녀가 겪은 경험을 일련의 단계들로 표현해보면, 그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채찍과 당근의 반복이었다.
(1) 공포감 조성
맨 처음 군인들에 의해 제압당할 때, 그녀는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로 최악의 삶의 질을 경험했다. 손에는 수갑이 차 있고 바지에는 소변이 흐르며 몸 전체에서는 냄새가 나도 달리 방법이 없는 삶 말이다. 특히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와 갑자기 총에 쏘이는 여성 무리를 본 이후라면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2) 자원 제공
운동장에서 최악을 경험한 그녀는 이후 스타디움으로 옮겨졌다. 음식도, 화장실도 없던 운동장이었기에 아침으로 주어진 빵과 물이 꿀맛처럼 느껴지고, 화장지 대신 손을 써도 변기가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해했다.
(3) 공포감 조성
하지만 채찍과 당근을 받은 후에는 또다시 채찍이었다. 갑작스럽게 ‘땡크 탱크’(유치장 독방 같은 곳으로, 어둠밖에 없다)로 끌려간 그녀는 이유 없이 여러 명의 남자들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4) 자원 제공
그리고 나면 엄청난 공포를 상쇄하기 위해 또 다른 당근이 주어졌다. 바로 호텔이다. 사실 그녀가 간 곳은 ‘호스텔’이었지만, 그 순간 그녀에게 이 호스텔은 호텔 그 자체였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그녀는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침대와 몸을 닦을 수 있는 수건이 있었고, 아침이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나왔다.
(5) 선택의 시간
이젠 선택이었다. 운동장에서 여자들을 쏘던 사격수가 될지, 사격수에 쏘이는 한 명의 희생양이 될지 그녀는 극단적인 두 선택지 중에서 반드시 골라야 했다.
“달리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 리디아 아주머니의 대사 중 가장 공감됐던 말이다. 만약 채찍만 경험했더라면, 그녀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조금의 희망도 버리고 희생양이 되기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당근만 경험했더라도, 양심에 따른 죄책감에 의해 사격수의 희생양이 되기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살을 찢는 듯한 채찍과 너무도 달콤한 당근을 반복적으로 받으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렇게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녀는 공포의 권력에 복종한 것이다.
º 권력의 저항
한편 그녀가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 다시 말해 저드 사령관의 약점까지 꿰며 길리아드 정권의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전과는 180도 다른 선택을 했다. 앞에서는 아주머니, 뒤에서는 첩보원의 역할을 톡톡히 다하며 오브프레드의 탈출을 비롯해 저항세력의 반란까지 도왔다. 그녀는 때와 장소에 맞게 가면을 쓰면서 치밀하게 길리아드를 몰락의 길로 인도했다.
사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두고 보았을 때, 개인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부합하게 자신이 변하거나, 자신의 철학에 맞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부류. 사실 권력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개인은 현실에 안주하며 안정적으로 살기 마련이다. 그 사회가 합리적이든 아니든 간에 일단 자신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직장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상사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처럼 자신에게 편한 방향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리디아 아주머니는 달랐다. 아주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을 통해 몇십 년간 간직해 온 파괴라는 꿈을 결국 실현시켰다.
비록 두 번째 선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몇몇 여성의 지위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렸지만, 결국 모든 여성의 해방을 얻어냈기에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국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리디아 아주머니. 국가 성장에 기여했으나 파괴의 선두자가 되는 리디아 아주머니. 결국 <증언들> 속 길리아드는 처음부터 생겨서는 안 되었던, 처음부터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디스토피아였다.